백야공화국에는 오래전부터 모두가 두려워하는 괴물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붉은 그림자라고 불렀다.
정부는 말했다.
붉은 그림자가 나라를 무너뜨리려 한다.
붉은 그림자를 막기 위해서는 자유를 조금 포기해야 한다.
붉은 그림자를 막기 위해서는 감시가 필요하다.
붉은 그림자를 막기 위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빵값이 비싸다고 말한 사람도 붉은 그림자가 되었고,
정부를 비판한 사람도 붉은 그림자가 되었으며,
다른 외교정책을 주장한 사람도 붉은 그림자가 되었다.
어느 순간 사람들은 깨달았다.
괴물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괴물을 핑계 삼아 사람을 잡는 권력이 더 무섭다는 것을.
그때 광장에 젊은이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나왔다.
그들은 군인의 총보다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가 나라의 주인이다.
투표할 권리를 달라.
정부는 군대를 보냈다.
최루탄이 터졌다.
사람들이 쓰러졌다.
그러나 광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침내 군인들은 물러났다.
직접 선거가 시작되었다.
광장은 환호했다.
민주주의가 승리한 것이다.
그날 밤 광장의 영웅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말했다.
우리는 절대로 저들처럼 되지 말자.
우리는 자유를 지키자.
우리는 관용을 잊지 말자.
사람들은 그 말을 믿었다.
진심으로 믿었다.
세월이 흘렀다.
광장의 영웅들은 늙었다.
그리고 나라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들은 혁명기념관이라는 거대한 건물을 세웠다.
원래는 민주주의를 기념하는 장소였다.
하지만 어느새 정치인들이 줄을 서는 장소가 되었다.
장관이 되고 싶은 사람도,
공천을 받고 싶은 사람도,
당의 중요한 자리를 얻고 싶은 사람도,
모두 혁명기념관을 찾았다.
그곳에는 광장의 영웅들이 앉아 있었다.
공식 직책은 없었다.
선거에 출마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그들의 눈치를 보았다.
사람들은 말했다.
그들은 나라를 구한 영웅이다.
그들의 의견을 듣는 것은 당연하다.
그 말도 맞았다.
하지만 점점 이상해졌다.
나라의 중요한 결정이 국회보다 먼저 기념관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혁명기념관 옆에는 거대한 방송탑이 세워졌다.
그곳에는 광대들이 살았다.
광대들은 매일 밤 방송을 했다.
오늘의 배신자는 누구인가.
오늘의 적은 누구인가.
오늘의 충성파는 누구인가.
시민들은 그 방송을 열심히 보았다.
정치인들도 열심히 보았다.
광대가 칭찬하면 정치인의 인기가 올라갔다.
광대가 비난하면 정치인의 미래가 사라졌다.
어느 날 젊은 의원 한 명이 말했다.
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순간 방송탑이 흔들렸다.
광대들은 웃으며 말했다.
저 사람은 배신자다.
시민들은 분노했다.
의원의 가족까지 욕을 먹었다.
친구들이 떠났다.
당도 그를 외면했다.
그는 결국 침묵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도 토론하지 않았다.
오직 편만 존재했다.
혁명세대의 아들인 민서는 어느 날 오래된 창고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군부시절 기록들이 있었다.
반역자 명단.
불순분자 명단.
위험인물 명단.
민서는 놀랐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새 시대의 명단도 똑같았다.
이름만 달랐다.
과거에는 붉은 그림자라고 적혀 있었다.
지금은 배신자라고 적혀 있었다.
과거에는 국가의 적이라고 적혀 있었다.
지금은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방식은 같았다.
민서는 혁명기념관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광장의 영웅들이 보였다.
그들은 젊은 시절 군부를 향해 주먹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늙은 모습으로 다른 사람을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민서는 문득 깨달았다.
괴물은 한 번도 죽은 적이 없었다.
괴물은 군복을 입고 있던 적도 있었고,
정장을 입고 있던 적도 있었으며,
혁명가의 얼굴을 하고 있던 적도 있었다.
괴물은 언제나 같은 말을 했다.
나를 비판하는 자는 적이다.
그 순간 거울 속 영웅들의 얼굴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민서는 마침내 알아보았다.
그들이 싸워 이긴 것은 괴물이 아니었다.
괴물의 자리였다.
거울 아래에는 오래전 광장에서 쓰인 낡은 문장이 남아 있었다.
민서는 먼지를 털어내고 천천히 읽었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권력을 잡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권력을 가졌을 때도 반대자의 자유를 지켜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광장에는 다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누구를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도 괴물이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야기는 거기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