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5. 4. 19:52

가정의 역사 - 고구려의 삼국통일


역사는 가정을 용납하지 않는다. 세계 어느 지역에서건, 가정의 역사를 용납하는 곳은 없다. 역사는 오로지 정반합의 논리대로 움직이며, 그 차는 속도가 느린것과 빠른다라는 차이만 있을뿐, 가정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의 가정을 세우고 시나리오를 대충이나마 맞춰보는것도 재미있는 작당이기도 하다.

민족이라는 개념도,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근거하여, 서구 열강의 백인우월론에 바탕을 둔 제국주의  합리화를 위하여, 이용된 구석이 매우 많다. 

민족의 단위가 생긴것은 근대라고 가정하면 먼 옛날의 고구려,백제,신라가 있던 극동아시아 지역은 민족의 개념보다는 정치적인 국가라는 울타리와 경제적인 권역을 두고 동족이라도 할지라도 치열하게 싸웠음을 알수 있다.

또한 고구려와 신라,백제가 모두 같은 동족이라는것도 한번 의심해볼 가치가 있다.

신라와 백제,가야는 원래 삼한지역에 위치한 국가로서, 마한,진한,변한등의 경제권역이 성립된 지역이다. 이지역에 국가라는것이 태동하는것은, 대륙으로 부터의 강력한 철기문화의 사람들과 원래 존재했던 원주민들의 융합으로 이뤄어 졌음을 유추해볼수 있다.

고구려는 부여계를 바탕으로 한 국가이다. 또한, 백제는 고구려에서 정쟁으로 축출당하거나  고구려의 지배층에서의 소외계급이 마한 지역(경기도,충청도,전라도)으로 남하하여 원주민과 융합하여 만든 국가임은 사료를 통하여 알수 있다.

고구려려는 원래 부여계통으로 부여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세운 나라임도 여러 사료를 통하여 알수있다.

그러나 신라와 가야국의 경우, 고구려나 백제와 비교해 매우 다른 이질적인 융합을 보인다.

신라와 가야의 왕족은 박,김,석씨로서 고구려와 백제와 상이하게  중국식 성을 차용했다는점과 신라지역에서 보이는 많은 유물들이 기존의 한반도에서 출토되던 유물이나 무덤과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는 점에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와는 다른 이방인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나라임이 틀림없다.

혹자들은 신라가 흉노세력이 해상 루트를 따라 이동해와 진한세력에 터를 잡고, 다른 흉노세력인 가야국 변한까지 흡수했음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근거로는 신라의 김씨족 왕들이 흉노의 자손임을 비문을 통해서 알리고 있는점도 그러하며, 신라 지배층들의 많은 무덤이 흉노식 무덤과 흡사하며, 삼국지위지동이전에서 알리다 싶이 백제와 고구려는 동일 언어를 사용하지만, 신라의 경우는 이질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라가 흉노족에서 기인하건 아니하건간에 백제와 고구려와는 다른 이질적인 혈연적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이천년이 지난 지금에서 신라,고려,조선을 거쳐 한반도의 거주민들이 단일 경제권, 단일 정치권을 확립하여 韓족이라는 단일적 혈연관계를 잉태했지만 이천년전의 한반도는 그야 말로 여러 민족들이 융합되는 과정에 있었음을 알수 있다.

우선 한사군의 존재는 한나라의 철기문화를 한반도에 전파하는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수 있다. 한사군은 부여계와 한족들이 같이 거주하였으며, 고구려에 통합되고 나서 자연히 한족들도 부여계 고구려인들에게 흡수되었거나, 아니면 모두 주살당했을경우도 생각할수 있다.

하지만 한반도내에서의 한족이 혈연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상당히 큰것이며 꼭 국수주의적 논리로서 볼 필요는 없다.
 
결론적으로는 삼국시대에는 여러민족의 통합이 한반도내에서 이루어지던 시대였으며, 남쪽에서의 해양세력과 북쪽에서의 기마세력이 토착화하면서 하나의 무리를 이루며 정치적인 국가라는것을 성립하였음을 알수있다.

중국과 일본도 마찬가지로서, 중국은 중부지역의 한족을 중심으로 흉노,선비,거란,몽고,남만족,융족등이 중원을 무대로 정치적 사투를 벌이며 이룩해논것이 지금의 중국이라고 할수 있다. 지금의 중국은 중원지역의 한족문화에만 국한되는것이 아닌, 기마민족과 서역지역,남만족들의 혈족과 문화가  중원의 한족의 농경문화속으로 흡수된것이다.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할수 있는 기회는 여러번 있었다. 신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와 대립관계인 시기인 고구려 장수왕때이다. 하지만 고구려는 신라를 복속하지 않았고, 제후국의 형태로 남겨둔다. 또한 백제와의 전투에서 여러번 이겼는데도 불구하고 삼한의 아래까지 진격하지 않는다.

모르는 사실이지만,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관련하여 한반도 남부의 국가들을 존속시켜야 하는 커다란 이유가 있었을것이다. 내정사정이 되었든, 국제정세가 되었든 남부의 국가들로 하여금 남부지역을 지키게 하여 커다란 이익을 챙길수 있는 또다른 이유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가정의 역사를 두고 생각한다면,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하였다면 어찌되었을까?

나의 생각은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와는 다른 견해를 갖는다.

아마도 지금의 우리는 없고, 중국식 문화속에서 살고 있을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조선족, 즉 한민족은 신라를 기반으로 한 삼한에 문화적인 기초에 기반을 두고 있다. 북방의 고구려는 군사적으로 광대하고 넓은 광야를 국토로 했다고 하나, 실제로 경제적 안정을 갖게 된것은 한사군의 복속과 함께 시작된다고 할수 있다.

백제와 신라로 대표되는 韓과 북방의 朝鮮부여족과의 대립이었다고 볼수 있다.

신라는 고구려가 강성했던 시절에는 친고구려적인 정책을 일관하다가, 고구려가 중국과 마찰을 일으키자, 친중국쪽으로 정책이 기운다.

남쪽의 한족이 북쪽의 부여조선족을 제압하는 시기가 바로 나당연합군에 의한 삼국통일이라고 가정할수 있다. 통일신라는 韓족의 근거지인 삼한지역과 옛 조선의 평야지역외에는 북방으로 진출하지 않았다. 그만큼, 가져도 쓸모없는 땅으로 치부되거나 안보상에 커다란 걸림돌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 수나라 당나라는 계속적으로 고구려와 전쟁을 했을까?
수나라의 경우 왕조의 존패를 걸고 고구려와 전쟁을 감행하고, 당의 경우 지금도 현군으로 떠받드는 당태종이 전쟁을 걸어왔다. 당국은 태종이후에도 계속적으로 고구려를 견제하며, 적국으로 삼았다. 즉, 고구려가 중국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만주는 요나라나 금나라처럼 중국을 위협하는 기마족들이 자생하고 발전한 지역이다. 그만큼 만주지역은 직접적으로 중국에 위협을 주는 지역이라는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만주지역을 점령했다. 고구려는 경제적 이익이 발생하는 한반도 중부지역을 잃으면서  국세가 상당히 하락하였다. 당은 한반도에 대한 욕심도 있었으나 , 곧 신라의 반격으로 포기하게 된다. 신라는 중국의 위협이 안된다는 판단하였던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신라는 한반도 중남부에 걸쳐서 안정적으로 독자적인 KOREA의 삼韓문화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북방의 호전적인 부여조선족이 한반도를 모두 점령했을경우, 비대해져버린, 중국과의 전투를 계속했을것이다. 적어도 수,당 시대에는 점령을 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중국의 왕조에서는 반드시 고구려와 전쟁을 했을것이고, 고구려가 이기던 지던간에, 후세의 금국이나 요국,몽고족과 같은 운명을 했을것이다. 

신라가 삼한의 문화를 토대로 독자적인 문화권과 혈족성을 확보하여, 그나마 韓이라는 이름이 후세에 전해져 왔을것이라 생각한다. 후레 원나라나,금나라(청국)에 점령당하는 사태를 맞이하더라도 북방대륙세력은 韓을 인정하고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인정한다.

하지만 고구려에 의해 통일이 되었고, 고구려가 만주경영을 계속하였다면, 韓족의 정체성은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의 생각이 든다.

단 하나의 가설이다. 하지만 거시적인 역사의 흐름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