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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5.06 사라진 고대 기마국가, 유목국가 흉노(匈奴)이야기- 흉노의 인종
  2. 2009.05.06 사라진 고대 기마국가, 유목국가 흉노(匈奴)이야기- 역사에서의 등장
  3. 2009.05.04 가정의 역사 -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기다. 1
  4. 2009.05.04 가정의 역사 - 고구려의 삼국통일
2009. 5. 6. 02:48

사라진 고대 기마국가, 유목국가 흉노(匈奴)이야기- 흉노의 인종


흉노에 의문을 가진 사람이라면 제일 궁금하게 여기는것이, 흉노는 어떤 인종이었느냐이다. 몽골로이드계인가? 아니면 몽골로이드와 코커서스 인종의 혼혈인가 하는 점이다.

결론 부터 이야기 하면  "니그로족은 아니다" 그외에 정확히 밝혀진 명확한것은 아직 없다.

흉노의 인종에 대해 가장 처음 묘사한 서적은 위서석륵전 및 진서에서 5호 16국시대의 후조국황제의 인상착위에서 묘사된것이 있다.

후조는 흉노계의 석씨족이 세운 국가이며,사서에서는 후조국 석씨일가의 용모에 대하여 "깊은 눈에 높은코 턱수염이 있다. "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보면 후조를 세운 석씨들은 몽골로이드와 코카서스인종의 혼혈족인듯 하다.

또한 여러사서에서 흉노족의 김일제(신라왕족의 선조라고 최근 연구되고 있음),유연,유요의 인상착위가 장신의 코커서스 북반구형으로 여러 중국사서에서 묘사되고 있어서 기원전후로 해서 흉노서쪽으로는 인종적 혼혈이 시작되었다고 볼수 있다.

혼혈의 근거는 진시황릉의 용갱에서 발견된 흉노족의 병사라고 추측되어지는 상들이 몽골로이드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로 유추해보자면 북몽골의 흉노족들이 점차 남하와 서하로 진출하면서 혼혈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2009. 5. 6. 00:11

사라진 고대 기마국가, 유목국가 흉노(匈奴)이야기- 역사에서의 등장


한무제와 이릉
북방의 이민족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한무제는 그의 총애하는 후비의 형제인 이광리로 하여금 흉노를 정벌케 하고자 하였으나, 이릉장군은 이광리로서는 흉노를 대적할수 없다고 간하다 무제의 노여움을 받는다.

결국 한무제는 이광리를 총사령관으로 하고, 이릉을 휘하 장수로 출전시키는데 이릉의 작전대로 흉노를 분산시키기 위해서 이릉은 5000의 기동대를 선발로 적진으로 들어가서 흉노군 10만과 용맹하게 싸운다.

하지만 이릉을 시기하던 이광리는 이릉을 지원하지 않게되고, 결국 이릉군사는 고립된다.
이릉의 군사는 식량과 무기가 떨어질때까지 마지막까지 버텼으나, 지원군이 오지않아 결국 남은 군사들을 데리고 흉노족의 항복권유에 손을 두고 만다.

이에 한무제는 탐탁치않게 여겼던 이릉의 처리를 어떻게 할것인가 대해 조회를 열게된다.


한무제와 사마천
평소 한무제가 이릉에 대해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것을 아는 중신들은 이릉에 대해 인신공격을 하면서, 이릉의 식솔들을 죽여야 한다고 아첨하게 되는데 , 이때 단 한사람 태사령 사마천만이 이릉의 용맹함과 이광리의 잘못을 간하며 , 이릉의 식솔들을 처벌하는것은 불가하다며 충언을 무제에게 이른다.

무제의 속셈을 알면서도 무제에게 이릉을 변호한 사마천이 노여워, 한무제는 사마천에게 궁형내지 사형을 택하라는 벌을 내린다. 당시로서 궁형은 사형보다 더 무서운 형벌로 취급되던 시절이었다.

사마천은 그의 부 사마담의 유언(중국의 역사서를 체계적으로 남기는일)을 지키기 위해, 조롱거리가 되는 궁형을 택하게 된다.


흉노와 사기
궁형을 받은 사마천은 옥사에서, 또한 환관이 되어 130권에 달하는 중국고대역사를 집필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사기(史記)이다. 사기는 동양역사서의 교본이라 할수 있는 편년체의 역사서를 탄생시킨다. 고대 하나라부터  한나라에 이르는 역사를 망라한 역사서이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흉노열전"는 제목으로 흉노에 대하여 종합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자로된 역사서에서 흉노는 최초로 등장하게 된다.

2009. 5. 4. 20:31

가정의 역사 -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기다.

도고헤이아치로 - 일본 해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이다. 이순신의 학익진을 러시아의 발틱함대에게 구사하여 러일전쟁 승리의 견인차를 만들어낸 인물이다.

하지만 학익진구사외에도 도고의 전술,전법이 러시아를 압도했음을 알수있다.

첫번째는 함정의 우수성이다. 당시의 세계 해전의 주류는 거함거포주의였다. 거포의 힘으로 적을 공격하는 전술이지만, 도고는 화약의 폭발력으로 적을 공격해야 우의에 선다는 전술로 발틱함대를 능멸할수 있었다.

두번째, 동아시아에 부동항이 없는 러시아로서는 유럽의 끝에서 항해를 시작해서, 극동아시아에 진출할수 있었다. 즉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극동지역으로 오기 위해서는 이집트의 수웨즈 운하를 통과해야 만 했다. 그러나 일본과 결탁한 영국이 수웨즈운하의 통과를 불허함으로서 발틱함대는 멀고도 먼 아프리카 남단을 지나 극동아시아에 올수 있었다, 추가적인 국가의 지원없이 먼길을 항해하여 온 지칠대로 지친 함대와 싸우는것은 너무나도 쉬운일.... 일본 외교력의 승리라고 할수 있다.

러일전쟁에서의 도고군이 지노비 로젠스발틱스키의 발틱함대를 상대로 승리를 이끌어낸것은 일본이 잘했다기 보다는 러시아의 삽질이 컸다. 이때부터 일본이 국제사회에서의 주목을 받게 되고, 일본의 조선합병은 러일전쟁으로 기정사실화 된다.

그렇다면 반대로 민자영(민비)의 바램대로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기고, 러시아가 조선에서의 종주권을 획득하였다면 어찌되었을까?

러시아와 같은 나라를 조선이 견제하며, 끝까지 지켜낼수 있었을까?

두가지의 가정이 있다. 하나는 지금 우리는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의 한 일원이었다가 독립하여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과 같은 독립국이 되었있을수도 있다. 물론 북부유럽의 백인종과 황인종이 결합된 민족구성을 보일것이다.

소비에트가 성립된것이 1920년대이고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30년후의 일이다.. 조선은 일본이 아닌 서구 열강중 후진국의 하나인 러시아의 지배를 받을것이다.

독립을 지켰다고 해도 주류세력이 러시아와 교체되면서, 러시아 문화의 유입은 실로 커졌을것이다. 소비에트에서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나듯이, 러시아의 주류 사상이 그대로 도입되어, 조선도 볼세비키 혁명에 가담하는 세력이 나오거나, 공산주의자들 세력이 커졌을것이다. 소비에트 연방에 가입했을 경우가 크다.

독립을 지키지 못했다고 한다면, 러시아의 속국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러시아공국으로서의 한 일원으로 조선은 지방 행정정부를 만들고, 러시아의 군대가 파견, 외교권 박탈로 이어졌을것이다. 물론 볼세비키 혁명에 의해, 자연적으로 왕족의 숙청과 함께 소비에트 연합의 한 일원으로 사회주의 정권이 도입되었을것이다. 아마도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벡키스탄의 지위에 오르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을 생각해본다.

두번째 가정으로는 극동아시아에서 부동항을 획득한 러시아가 제국주의 노선을 확대하여, 극동아시아의 맹주가 되어, 경제적인 이득의 획득과 함께 일본을 제압하여 일본마져도 러시아 세력으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 물론 덩치가 크지만 패전국 일본은 러시아의 요구조건을 안들어줄수 없고 , 극동의 정세가 러시아로 집중되어 러시아 왕조가 계속 이어질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줬을수도 있다. 그렇다면 볼세비키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서, 2차세계대전을 다시 써야 하는 가정을 만들수 있다.

볼세비키 혁명이 없었다면, 냉전은 오지 않았지만, 대공황의 엄습으로 계속되는 대규모적인 전쟁은 필연적이었다고 생각된다. 그 와중에서 사회주의자들은 계속적으로 혁명을 일으켰을것이고, 결국은 제2의 볼세비키가 일어나, 러시아는 공산주의의 실험의 한장소가 됐을리 자명하다.

어쨋건 러시아가 러일전쟁에 이겼다면, 우리는 지금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과 같은 비슷한 지위에 있지 않을까 가정해본다...

물론 한반도의 그들은 우리가 아닐것이다...

2009. 5. 4. 19:52

가정의 역사 - 고구려의 삼국통일


역사는 가정을 용납하지 않는다. 세계 어느 지역에서건, 가정의 역사를 용납하는 곳은 없다. 역사는 오로지 정반합의 논리대로 움직이며, 그 차는 속도가 느린것과 빠른다라는 차이만 있을뿐, 가정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의 가정을 세우고 시나리오를 대충이나마 맞춰보는것도 재미있는 작당이기도 하다.

민족이라는 개념도,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근거하여, 서구 열강의 백인우월론에 바탕을 둔 제국주의  합리화를 위하여, 이용된 구석이 매우 많다. 

민족의 단위가 생긴것은 근대라고 가정하면 먼 옛날의 고구려,백제,신라가 있던 극동아시아 지역은 민족의 개념보다는 정치적인 국가라는 울타리와 경제적인 권역을 두고 동족이라도 할지라도 치열하게 싸웠음을 알수 있다.

또한 고구려와 신라,백제가 모두 같은 동족이라는것도 한번 의심해볼 가치가 있다.

신라와 백제,가야는 원래 삼한지역에 위치한 국가로서, 마한,진한,변한등의 경제권역이 성립된 지역이다. 이지역에 국가라는것이 태동하는것은, 대륙으로 부터의 강력한 철기문화의 사람들과 원래 존재했던 원주민들의 융합으로 이뤄어 졌음을 유추해볼수 있다.

고구려는 부여계를 바탕으로 한 국가이다. 또한, 백제는 고구려에서 정쟁으로 축출당하거나  고구려의 지배층에서의 소외계급이 마한 지역(경기도,충청도,전라도)으로 남하하여 원주민과 융합하여 만든 국가임은 사료를 통하여 알수 있다.

고구려려는 원래 부여계통으로 부여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세운 나라임도 여러 사료를 통하여 알수있다.

그러나 신라와 가야국의 경우, 고구려나 백제와 비교해 매우 다른 이질적인 융합을 보인다.

신라와 가야의 왕족은 박,김,석씨로서 고구려와 백제와 상이하게  중국식 성을 차용했다는점과 신라지역에서 보이는 많은 유물들이 기존의 한반도에서 출토되던 유물이나 무덤과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는 점에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와는 다른 이방인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나라임이 틀림없다.

혹자들은 신라가 흉노세력이 해상 루트를 따라 이동해와 진한세력에 터를 잡고, 다른 흉노세력인 가야국 변한까지 흡수했음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근거로는 신라의 김씨족 왕들이 흉노의 자손임을 비문을 통해서 알리고 있는점도 그러하며, 신라 지배층들의 많은 무덤이 흉노식 무덤과 흡사하며, 삼국지위지동이전에서 알리다 싶이 백제와 고구려는 동일 언어를 사용하지만, 신라의 경우는 이질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라가 흉노족에서 기인하건 아니하건간에 백제와 고구려와는 다른 이질적인 혈연적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이천년이 지난 지금에서 신라,고려,조선을 거쳐 한반도의 거주민들이 단일 경제권, 단일 정치권을 확립하여 韓족이라는 단일적 혈연관계를 잉태했지만 이천년전의 한반도는 그야 말로 여러 민족들이 융합되는 과정에 있었음을 알수 있다.

우선 한사군의 존재는 한나라의 철기문화를 한반도에 전파하는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수 있다. 한사군은 부여계와 한족들이 같이 거주하였으며, 고구려에 통합되고 나서 자연히 한족들도 부여계 고구려인들에게 흡수되었거나, 아니면 모두 주살당했을경우도 생각할수 있다.

하지만 한반도내에서의 한족이 혈연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상당히 큰것이며 꼭 국수주의적 논리로서 볼 필요는 없다.
 
결론적으로는 삼국시대에는 여러민족의 통합이 한반도내에서 이루어지던 시대였으며, 남쪽에서의 해양세력과 북쪽에서의 기마세력이 토착화하면서 하나의 무리를 이루며 정치적인 국가라는것을 성립하였음을 알수있다.

중국과 일본도 마찬가지로서, 중국은 중부지역의 한족을 중심으로 흉노,선비,거란,몽고,남만족,융족등이 중원을 무대로 정치적 사투를 벌이며 이룩해논것이 지금의 중국이라고 할수 있다. 지금의 중국은 중원지역의 한족문화에만 국한되는것이 아닌, 기마민족과 서역지역,남만족들의 혈족과 문화가  중원의 한족의 농경문화속으로 흡수된것이다.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할수 있는 기회는 여러번 있었다. 신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와 대립관계인 시기인 고구려 장수왕때이다. 하지만 고구려는 신라를 복속하지 않았고, 제후국의 형태로 남겨둔다. 또한 백제와의 전투에서 여러번 이겼는데도 불구하고 삼한의 아래까지 진격하지 않는다.

모르는 사실이지만,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관련하여 한반도 남부의 국가들을 존속시켜야 하는 커다란 이유가 있었을것이다. 내정사정이 되었든, 국제정세가 되었든 남부의 국가들로 하여금 남부지역을 지키게 하여 커다란 이익을 챙길수 있는 또다른 이유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가정의 역사를 두고 생각한다면,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하였다면 어찌되었을까?

나의 생각은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와는 다른 견해를 갖는다.

아마도 지금의 우리는 없고, 중국식 문화속에서 살고 있을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조선족, 즉 한민족은 신라를 기반으로 한 삼한에 문화적인 기초에 기반을 두고 있다. 북방의 고구려는 군사적으로 광대하고 넓은 광야를 국토로 했다고 하나, 실제로 경제적 안정을 갖게 된것은 한사군의 복속과 함께 시작된다고 할수 있다.

백제와 신라로 대표되는 韓과 북방의 朝鮮부여족과의 대립이었다고 볼수 있다.

신라는 고구려가 강성했던 시절에는 친고구려적인 정책을 일관하다가, 고구려가 중국과 마찰을 일으키자, 친중국쪽으로 정책이 기운다.

남쪽의 한족이 북쪽의 부여조선족을 제압하는 시기가 바로 나당연합군에 의한 삼국통일이라고 가정할수 있다. 통일신라는 韓족의 근거지인 삼한지역과 옛 조선의 평야지역외에는 북방으로 진출하지 않았다. 그만큼, 가져도 쓸모없는 땅으로 치부되거나 안보상에 커다란 걸림돌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 수나라 당나라는 계속적으로 고구려와 전쟁을 했을까?
수나라의 경우 왕조의 존패를 걸고 고구려와 전쟁을 감행하고, 당의 경우 지금도 현군으로 떠받드는 당태종이 전쟁을 걸어왔다. 당국은 태종이후에도 계속적으로 고구려를 견제하며, 적국으로 삼았다. 즉, 고구려가 중국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만주는 요나라나 금나라처럼 중국을 위협하는 기마족들이 자생하고 발전한 지역이다. 그만큼 만주지역은 직접적으로 중국에 위협을 주는 지역이라는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만주지역을 점령했다. 고구려는 경제적 이익이 발생하는 한반도 중부지역을 잃으면서  국세가 상당히 하락하였다. 당은 한반도에 대한 욕심도 있었으나 , 곧 신라의 반격으로 포기하게 된다. 신라는 중국의 위협이 안된다는 판단하였던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신라는 한반도 중남부에 걸쳐서 안정적으로 독자적인 KOREA의 삼韓문화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북방의 호전적인 부여조선족이 한반도를 모두 점령했을경우, 비대해져버린, 중국과의 전투를 계속했을것이다. 적어도 수,당 시대에는 점령을 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중국의 왕조에서는 반드시 고구려와 전쟁을 했을것이고, 고구려가 이기던 지던간에, 후세의 금국이나 요국,몽고족과 같은 운명을 했을것이다. 

신라가 삼한의 문화를 토대로 독자적인 문화권과 혈족성을 확보하여, 그나마 韓이라는 이름이 후세에 전해져 왔을것이라 생각한다. 후레 원나라나,금나라(청국)에 점령당하는 사태를 맞이하더라도 북방대륙세력은 韓을 인정하고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인정한다.

하지만 고구려에 의해 통일이 되었고, 고구려가 만주경영을 계속하였다면, 韓족의 정체성은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의 생각이 든다.

단 하나의 가설이다. 하지만 거시적인 역사의 흐름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